아주 신씨(鵝洲申氏)는경상남도거제시아주동(鵝洲洞)을 본관으로 하는한국의성씨이다.그런데 우연히 경북 의성군(義城郡) 출신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 1731~1812)의 <세첩권수소지(世牒卷首小識)>를 읽게되었는데 거제(巨濟) 아주(鵝洲)를 본관으로하는 문중에서, 자신들의 관향(貫鄕)에 대한확신이 없는 것을 보고, 한마디 적지 않을 수가 없어 지면을 빌어 기술해 본다.
옛날 왕조시대에는 지금처럼 기록이나 지식이 널리 통용되지 못한한계로 인해, 수백 년 세월이 흐르면서 집안의 올바른 역사는 점점 흐려지고 잘못된 기록물에 따른 오해도많아졌다. 게다가 조상세계(祖上世系) 조작이 발호하고위보(僞譜)가 속출하였기에, 아주 신씨의 믿을만한 기록물들을, 이번 지면을 통해 다시금 들여다보고 올바른 문중 세계(世系)를 알려드리고자한다.
○ 경북 의성군에 아주 신씨가 세거하게 된 것을 결론부터 말하면, 옛날 고려시대 거제도 아주현(鵝洲縣) 호장(戶長) 신영미(申英美)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고려말기 아주현 사람들이 삼별초의 난을 피해 거창(居昌)으로 이주했는데, 이후 4세손 신윤유(申允濡)가 상주(尙州) 지역으로옮겨갔고 다시 의성군 단밀면(丹密面)으로 이주하면서 아주신씨 의성 입향조(入鄕祖)가 된 것이다. 그의 아들 신우(申祐)는 고려말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부친을 모시고 친분관계가 있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낙향했다. 길재는 경북 선산, 신우(申祐)는 경북 상주 망경산 아래 정착하여 일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채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런 친분관계로 우(申)의 아우인면의 딸이 길재와 혼인하게 되었고, 이로써 조선조 내내 의성군이 아주 신씨의 세거지가 된 것이다.
◉ 관향 아주(鵝洲)는 경상남도거제시에 속한 지명이다. 본래 거로현(巨老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아주현(鵝洲縣)으로 고치고,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아주(鵝洲)의 성으로 신(申)·문(文)·갈(葛)·조(曺) 4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 신(申)의 성은 아주 신씨를 일컫는다. 삼국사기에는소성왕(昭聖王) 원년(799년) 춘 3월에는 청주(菁州, 現 진주)의 거로현(居老縣), 즉 거제시의 아주현(鵝州縣)을 국학생(國學生)의 녹읍(祿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불교문화가융성해 법률사가 있었고, 현재 아양리(鵝陽里)에 경남문화재인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고 청동기시대 지석묘와 신라시대 고분이 복합적으로 형성된 아주동 고분군이 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 그런데 고려 24대원종(元宗)때는 삼별초(三別抄)의 난을피해 거제도 내 아주현과 송변현의 사람들이 내륙지방인 거창군 가조면으로 이주해 갔다. 명진현의 사람들도역시 삼별초와 왜구를 피해 진주(晋州)로 옮겨갔다. 게다가 이후에도 계속된 왜구의침략으로 인해 거제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창의 속현인 가조현(加祚縣, 가조면) 정착지에서 거제현(巨濟縣) 관청이 들어서고더부살이를 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 거제현(가조면)에는 아주현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의 집촌을 아주촌(鵝洲村)이라 불리어졌다. 이로써 관향(貫鄕)이 사라지고폐현이 되다보니 당시 아주를 본관으로 삼은 신씨(申氏)들도 허탈했을것이다. 하지만 옛 아주지역은 오늘날 대우조선(大宇造船)이 들어섰다. 세계 굴지의 선박건조회사로 옛 아주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아주신씨로 봐서는 전날의 허망함에서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나싶다.
◉ 한편 일제강점기에 활약했던 거제도 유학자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1875~1951)선생이 약 100년전에, 그의 집안 의성 김씨 문중의 일을 보고 경북 안동에서 의성으로 내려오다가 경북 의성군의 아주(鵝洲) 신(申)씨 세거지를찾아가 신(申)씨들을 만나서 관향(貫鄕)인 아주는거제도에 있는 오래된 고을이라고 했더니 신(申)씨들은 “그렇지 않다고답하며 또한 모른다”고 말하였다. “어찌 관향에 대해 뚜렷한 증거도 없이 구전으로 말할 수 있겠느냐했다”고 명계(明溪) 선생의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 한편 아주 신씨의 근원이 거제도 아주현의 호장(戶長) 신영미(申英美)에서 비롯되었다는것을 알 수 있는 문헌(文獻)이 여럿 있는데 이는 그들의 집안 족보나 가첩에 기록된 문서 외, 정사(正史) 자료의 기록물이다. 이것은 조선조(朝鮮朝) 왕명(王命)에 의해서 인물(人物), 세헌(世獻) 등에 관해서 편찬을 한 국가적(國家的) 문헌 <문헌비고(文獻備考)>라는 책이다. 이 문헌비고는 조선 21대 영조(英祖) 때 편찬된것이다. 그리고 1924년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발행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라는 책도있다. 문헌비고의 기록뿐만 아니라 이 책에도 아주신씨(鵝洲申氏)의 시조는신영미(申英美)라고 표기되어 있다.
○ 또한 <아주신씨선대사적(鵝洲申氏先代事蹟)>이란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이글은 시조 신영미(申英美)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내용이다. 해석을 하면다음과 같다. 「고려에서 권지호장(權知戶長)은 고구려백제 신라의 삼국시대(三國時代) 패기가 있는 무인(武人)들의 호족세력으로주(州), 군(郡), 현(縣)에 거주하며 토지(土地)를 가진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나라에 바치는 물자와 세금을 보내고 하였다. 이로인해서 지역에 호장이란 게 있었고 본관을 갖는 바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나라에서 향리(鄕吏)라는 관직(官職)이 시작된것이다.」[高麗朝權知戶長三國之季人各以豪武覇於洲郡縣據有土地人民以輸貢賦於國因以爲所在戶長育子長孫遂爲本貫此我國鄕吏之始也] 여기서 권지(權知)는 관리시보(官吏試補)의 뜻을가지고 있으며 임시로 어떤 공무(公務)를 관장한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호장직(戶長職)에 있으면 자손들이 과거시험에 나갈 수도 있고 중앙관서(中央官署)에 진출하여사족(士族)이 되는 기회도 있었다. 시조의 증손(曾孫) 신윤유(申允濡)가 그 예의인물로, 고려 말 판도판서(判圖判書)라는 벼슬을지냈던 인물이다.
참고로 왕조시대 아주 신씨(鵝洲申氏)의 중앙정부의 문무과 합격 기록은 14명이고생원시 합격 기록은 31명이며, 진사시 기록은 7명, 음관 목록 기록에는 6명이등재되어 있고, 전국에 약 3만명 정도가 현재 살고 있다.
● 다음은 경북 의성군 출신 유학자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 1731~1812)의 <세첩권수소지(世牒卷首小識)>이다. 이 글은 아주(鵝洲) 신씨(申氏) 세첩에 대한 소지(小識)이다. 여기 제목의 세첩(世牒)은 족보의일종이다. 족보와 비슷한 말로 세보, 가첩, 파보, 가보, 대장보등등 60여 종이나 된다. 그리고 권수(卷首)는 책의 첫머리란 뜻이고 소지(小識)는 대체로짤막한 글을 일컫는다. 그래서 <세첩권수소지(世牒卷首小識)>는 ‘족보(세첩) 첫머리에 얹은 짧은 글’이라는 뜻이다.
아주(鵝洲) 신씨(申氏)의 관향(貫鄕)인 아주(鵝洲)는 거제도의 속현이다. 혹자는 한산(韓山)의 구호가 鵝州이므로 아주 신씨가 한산 신씨에서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洲와州는 별개의 글자이긴 해도 옛 선조들의 오기(誤記)에서 비롯된한바탕 곡해일 뿐이다. 이로부터 지난 고문서를 살펴보면 경상북도 의성군과 안동군의 옛 아주 신씨들은모두 ‘아주(鵝洲)’ 신(申)씨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후인들이 잘못 표기된 글자를 수용하지 못하고, 마치다른 계통의 신(申)씨인양 고집하는 것은 무척 잘못된 처사라고 할 수 있다.그런고로 황해도 평산군을 본관으로 하는 평산(平山) 신(申)씨 신숭겸(申崇謙 ?~927) 장군과는전혀 연관성이 없는 집안이다.
<세첩권수소지[世牒卷首小識] 관향 아주의 내력> 신체인(申體仁1731~1812)
아주(鵝洲)는 거제(巨濟)의 속현이다. 지금 거제부(巨濟府) 아주현(鵝洲縣)에 여전히많은 신(申)씨들이 있다고 한다. 혹자가 이르기를, ‘한산(韓山)의 옛 이름이 아주(鵝州)이니 신씨의 선조는 아마 한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한다. 그러나 주(洲)자와 주(州)자는 진실로 같지 않다.
살피건대 퇴계 이황 선생이 일찍이 참봉(參奉) 신춘년(申椿年) 어른의 묘갈명을지으면서 “공은 거제 사람”이라 하였고 우리 할아버지 고송(孤松) 부군의 사마방안(司馬榜眼) 인쇄본에 “본(本)은 거제(巨濟)”라고 적혀 있으니 아주(鵝洲)가 거제지역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옛 전적을 보면 혹 거제(巨濟)로 적거나혹 아주(鵝洲)로 적어서 번갈아 쓰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지금 종친(闔族)들이 혹 본을 거제로 적는 이가 없고 아주(鵝洲)로만 칭하여마치 서로 상의한 듯하니 이것이 어느 세대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또 선배가 손수 쓴 시전(詩牋), 제명(題名)과 같은첩(帖)들을 보면 더러 ‘매성 후인(梅城後人)’이라고칭하였으니, 혹 거제현(巨濟縣)이 일명매성(梅城)으로 불렀는지 이 또한 모르겠다.
살피건대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부인이 바로 아주 신씨(鵝洲申氏)인데 주(洲)자가 더러주(州)자로 적혀 있다. 《포은집(圃隱集)》에 실려 있는 <포은문과 방목(圃隱文科榜目)>에 “신인보(申仁甫)가 병과(丙科) 1인으로 발탁되었으니 그 관향이 아주(鵝州)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주(州)자 또한물 수(水)를 쓰지 않았다. (왜 그런지)알 수는 없겠으나 이 또한 거제의 아주(鵝洲)인데 주(洲)자와 주(州)자는 음이같고 글자가 서로 비슷하므로 이내 잘못 쓴 것을 면치 못한(몰랐던) 듯하다. 아니면 별도로 하나의 신(申)씨가 한산(韓山)에서 나온 것인데 저대로 한산의 옛 이름으로 관향을 삼은 듯하다.
혹자는 “아주(鵝洲) 성씨는 본래평산(平山)에서 나뉘어져 나온 것으로 모두 장절공(壯節公, 평산 신씨신숭겸)의 후손이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이상할 것은 없으나근거할 만한 믿음직한 전적이 없다. 마땅히 박아(博雅)한 군자를함께 기다려 다시 질정(質正)해야 할 것이다.
신해년(1791년)에 아주 후인(後人) 신체인(申體仁1731~1812)이 병들고 죽을 나이에 근본과 시조를 미루어 생각하여 세계(世系) 한통을 만들고 사실과 관련된 글을 대략 덧붙여 본관과 고을을 궁구하여 논하고 후인들에게고칠 수 있도록 하노라. [鵝洲巨濟屬縣今巨濟府鵝洲縣尙多有姓申者云或謂韓山舊號鵝州申之先疑出於韓山而州與洲字固不同按退溪李先生嘗撰申參奉諱椿年墓碣曰公巨濟人我先祖孤松府君司馬榜眼印本書曰本巨濟鵝洲之爲巨濟地無疑矣故觀故籍或書以巨濟或書以鵝洲未嘗不迭用而今闔族無或以巨濟書本但稱鵝洲若相謀然未知始於何代又觀先輩手書如詩牋題名等帖或稱梅城後人或巨濟縣一名又稱梅城歟亦未可知也按吉冶隱夫人是鵝洲申氏而洲字或書以州圃隱集載圃隱文科榜目有曰申仁甫擢丙科一人其貫曰鵝州而州字亦不從水未知是亦巨濟鵝洲而洲與州音同而字相近故乃未免錯書歟抑別有一申姓出於韓山而自以韓山舊號爲貫歟或云鵝洲氏是本自平山分出俱爲壯節公後其說亦無怪而無信籍可据宜幷竢博雅君子更質焉歲辛亥月日鵝洲後人申體仁衰病垂死追惟本始爲修世系一通略附以事實文字因究論所貫鄕邑俾後人得有所攷云爾]
[주] 저자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 1731~1812) : 거주지 출생지는 경북 의성군이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자장(子長), 호는 회병(晦屛), 신숙범(申叔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분구(申賁龜), 아버지는신도만(申道萬)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 김민행(金敏行)의 딸이며 부인은 풍산 유씨(豊山柳氏) 유후원(柳後元)의 딸이다.
『아주 신씨 대동보』에 신체인의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화전리 동곡(凍谷)에 있다. 現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에 있는 금산 서원에 신지제(申之悌), 신지효(申之孝)와 함께배향되어 있다. 금산 서원은 신체인이 강학을 위해 1782년건립한 금연 정사를 1977년 중건하고, 1981년 서원으로승격한 것이다. 신체인의 위패는 신지제와 함께 1977년배향되었다.
● 지난 2020. 11. 제24회 경북영사인물학술발표회 "회당 신원록 선생의 삶과 학문"에서 임노직(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께서 의성지역 아주신씨의 가학 연원을 강의하시고 마지막에 위 문구를 해석해 주셨는데, 아주신씨 대종회 임원이 대종회는 신숭겸의 12세손신익휴(申翼休)를 시조로하고 있는데 왜 신영미(申英美)를 시조라 하느냐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자. 임노직박사가 답하길 "본인은 있는 문장을 해석했을 뿐이다. 그리고고서 대부분이 아주 신씨는 신영미(申英美)가 시조로 되어있다"라고 했다.[옮긴 글임] 아직도 많은 분들이 자신의 선조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것 같다.
◉ 그리고 꼭 알아야할 옛 기록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조선시대 관료, 학자, 부인들의 본관 중에 아주(鵝洲) 신(申)씨와 아주(鵝州) 신(申)씨의 비율은약 7:3 정도로 기록되어 있으며 아주(鵝州)로 기록된문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부분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부터이다. 이는 다른 성씨에서 본관이 모두 ‘특정고을 또는 지명’으로 표기 되어 있는 바, 아마도 물가 ‘洲’보다 고을 ‘州’로 자연스레 표기한 것으로보인다. 이는 어떤 큰 의미가 있다기보다 시대 흐름상 그렇게 적은 것인데 후세인들이 이를 두고 다른해석과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 아주(鵝‘洲’) 신(申)씨의 기록물을 작성한 인물로는,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 후산(后山) 허유(許愈), 효암(曉庵) 이중철(李中轍),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1763~1837),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등이 있다.
반면에 아주(鵝‘州’) 신(申)씨의 기록물을 작성한 인물 또는 책은 조선과환보(朝鮮科宦譜),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등이 있었는데, 조선후기 이백 년 동안 신(申)씨 집안 족보에 鵝‘州’로 표기된 집안이 더러 있다보니, 후인들이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 덧붙여 조선왕조실록이나 각종 기록물에 따르면, 아주 신씨(鵝洲申氏)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 1516~1576)는 경상북도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빙계서원(水溪書院)’을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후기의문신인 유관현(柳觀鉉1692~1764)의 어머니는 아주 신씨(鵝洲申氏)로, 통덕랑 신이징(申以徵)의 딸이라고적혀있다. 그리고 조선후기 학자 우계(迂溪) 박담(朴潭 1655∼1694)의 어머니도아주신씨(鵝洲申氏)라고 기록되어있다. 게다가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부인이 바로 아주 신씨(鵝洲申氏)인데 주(洲)자가 더러주(州)자로 적혀 있기도 하다.
김계윤(金季潤)
1875년(고종 12)∼1951년 11월 30일. 일제강점기처사(處士). 자는 사범(士範)이고, 호는 명계(明溪) 또는 명동(溟東)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좋아하여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오직 학문에 대한 일념(一念)을 가지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은물론 『근사록(近思錄)』에 이르기까지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중재(重齋) 김황(金榥)과도 학문적으로교유하였다. 스승의 상(喪)에매우 애통해 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향촌에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